26. 전능하신 천주 성부?

2019. 11. 9. 12:27천주교 신앙 생활 가이드

 

 

전능.

어떤 일이든 못하는 것이 없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그런데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고통과 악에 대한 문제이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데 고통은 왜 있는 걸까?

혹시 악도 하느님이 만드신 건 아닐까?

 

 

착하게 살면 상을 받고 행복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착하게 살면 호구처럼 취급받게 된다. 호의가 계속되면 호의가 돌아오지 않고 권리처럼 받아들이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상처 받게 되고 법을 잘 지킬수록 생활이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 앞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저 동화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연결된다.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학생이 물어볼 때에는 공기를 비유로 든다.

우리는 평소에 공기의 소중함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니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공기가 없는 상태, 곧 물에 들어가면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공기가 반드시 필요했고 늘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목숨을 걸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공기를 직접 감각하지는 못하지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흔들리거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공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역시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업적(성경 말씀, 자연 등)을 통해 그분을 깨달을 수 있다.

 

청년이 물어볼 때는 과거 신존재 증명 이야기를 해준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계란이 있어야 닭으로 성장할 수 있고, 닭이 있어야 계란을 낳을 수 있다. 그러면 영원한 시간까지 계속 인과 관계로만 이어질까? 스스로 원인이 될 뿐 결과가 되지 않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하느님이다. 

 

 

악은 왜 있는가?

 

때로는 선과 악을 나누어서 생각하기도 했다. 마치 세상은 선신과 악신의 싸움터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선신의 힘이 강할 때에는 세상에 평화가 오지만 악신이 강할 때에는 싸움과 죽음, 고통이 많아진다는 생각이다.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이지만 문제가 있다. 선신과 악신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두 신이 동시에 시작되었다면 그 두 신을 만든 또다른 존재가 필요해진다.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선과 악은 어떻게 나눠질까? 화약은 광산을 뚫는 좋은 도구가 되지만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화약은 선할까? 아니면 악할까? 선과 악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선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선과 악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따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그림자는 빛이 있을 때 생기지만 빛이 없어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어떤 기준에 따라 선이 부족할 때 악이 나타난다.

 

우리들 개개인이 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상대주의에 빠져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기준으로 한다면 모든 사람은 선하지만 아직 부족한 면이 많을 뿐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며 정화의 시간을 가질때, 우리는 선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참고하면 좋은 책

조너선 모리스 - 하느님의 약속

리처드 레너드 - 도대체 하느님은

게르하르트 로핑크 - 오늘날의 무신론은 무엇을 주장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