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다리던 메시아. 왜 거부하였을까?

2019. 11. 14. 09:20천주교 신앙 생활 가이드

세례 사건은  삼위일체가 함께 하는 놀라운 순간이며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일한 왕은 하느님이시다.

현실에서의 왕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자일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지만 이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이 보낸 자라는 의미일 뿐이다. 그만큼 하느님을 기다리고 갈망하던 이들에게 역사적 순간이 왔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이미 성조 때부터 하느님의 말씀은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전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었다. 다만, 모든 사람이 그분의 뜻을 찾고 살아가지 않기에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현실과 달라 보이는 말씀, 지금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말씀, 고통과 악에 힘들어하는 이들은 머리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자기 나름의 해석에 빠져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정답이 유출된 시험을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직접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분을 의심하는 이를 향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다. 바로 기적과 이적과 표징을 통해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었다. 병에 시달리는 이는 치유하고 마귀에 고통받는 이는 해방을 주었다. 심지어 성난 파도를 잠재우는 기적을 통해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했다. 모든 기적과 이적과 표징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였다.

 

명확히 약속된 메시아였다.

그러나 메시아를 반대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며 성전 파괴 후 떠나신 하느님이 다시 그분의 자리로 돌아오셨지만, 이분을 향한 환호 뒤에 음모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뻐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분을 죽일 궁리를 하였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에만 매달리며 그분을 반대하였다.

 

 

 

예수님을 반대한 세 가지 이유

율법에 대한 자세/ 성전에 대한 인식/ 유일신 신앙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잃고 유배를 갔을 때, 커다란 상실감을 체험했다. 하느님이 자신들을 버린 듯한 경험은 하느님의 말씀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율법을 더욱 잘 지킬수록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정신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잡아주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왔다.

 

성전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눈에 보이는 표지였다. 성전에 파괴된 후, 커다란 상처를 받았던 그들은 다시 성전을 재건하며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 성전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저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상징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세운다고 하니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간혹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다.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처럼 여러 신들이 함께 하는 다신관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결국 한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위협하는 예수님은 거부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후 십자가 형을 선고받는다.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수난받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한 주간을 우리는 성주간이라 부르며 전례력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주일을 지낸다. 우리들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 그런 분을 죽인 유다인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예수님의 죽음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그 책임을 우리 모두에게 둔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들의 무지함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용서하셨기에 그들에게 책임을 모두 넘기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오히려 예수님을 알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분을 우리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 된다.